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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문 (서울 독립문, 獨立門, Independence G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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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문 - 출처 : 서울시 독립문 건립 시기 1896년 ~ 1897년 독립문 주소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941이다. 독립문 위치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迎恩門)의 기둥만 남겨두고 철거했으며 앞쪽에 독립문을 세웠다. 중국 사신들이 들어오는 길에서 보면 영은문보다 40~50M 앞쪽에 독립문을 세운 것이다. 중국 사신을 접대하던 모화관(慕華館)은 독립관으로 바꾸었다.  건립 당시의 독립문 독립문 건립의 목적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조선의 독립이 확정된 후에 독립운동가 서재필의 주도로 건립되었다. 중국 청나라로부터 조선의 독립을 국내외에 널리 알리려는 목적으로 건립되었다. 철거되기 전의 영은문 1890년대 영은문(迎恩門) 영은문(迎恩門)은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곳인데 중국 사신이 오면 임금까지 나가서 맞이했다고 한다.  '영은(迎恩)'은 은혜로운 대국의 사신을 맞이한다는 뜻이며, 모화관(慕華館)은 중국 사신들을 접대하면서 조선의 왕세자들이 중국 사신들에게 절을 하고 예의를 차리는 곳이라고 하며 '모화(慕華)'는 중국이나 중국 것을 섬긴다는 뜻이다. 영은문은 갑오개혁 당시인 1895년 2월에 철거되었으며 지금은 영은문의 기둥을 받치던 주춧돌만 남아 있다. 참으로 비굴한 역사다. 독립문 이전(移轉 ) 1979년 성산로 공사 때 도로에 방해가 된다고 독립문을 북서쪽으로 70미터가량 옮겼다. 옮기면서 방향도 달라지고 독립문과...

이승복 -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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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복 이승복(李承福, 1959년 12월 9일 ~ 1968년 12월 9일)은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지금의 용평면) 도사리에서 태어나 1967년 3월 2일에 속사 국민학교 계방 분교에 입학했다. 속사 국민학교 계방 분교는 1998년 3월 2일 폐교하고 속사 초등학교로 통합되었다. 속사 국민학교 계방 분교는 폐교 후 지금은 이승복 기념관의 일부로 활용하고 있다. 이승복은 속사 국민학교 2학년이던 1968년 12월 9일에 북괴에서 남파되어 울진과 삼척으로 침투한 무장공비에게 입이 찢어지고 돌멩이로 머리를 맞아 학살당했다. 이승복과 함께 있던 어머니, 남동생, 여동생도 잔인하게 학살당하고 이승복의 형은 36군데나 칼에 찔려 거름 더미에 버려졌다가 발견되어 살아났고 이승복의 아버지는 이웃집의 이사를 도와주고 집에 왔다가 무장공비들에게 잡혀서 칼에 찔리는 중상을 입었으나 다행히 도망쳐서 살아났다. 무장공비가 이승복과 가족을 잔인하게 학살한 이유는 무장공비들이 이승복 가족을 방에 감금하고 북한 선전을 할 때 이승복이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했다는 이유로 잔인하게 학살했다는 것이다. 이승복이 북괴 무장공비들에게 학살당한 12월 9일은 생일이었다고 한다. 요즘 대한민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공산주의자들과 하수인들이 벌이는 인면수심의 광란을 보노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공산주의자들은 왜 그렇게 동족 학살을 일삼는지 섬뜩하기만 하다.

군사독재자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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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고령 박씨로 1961년 5월 16일 새벽 4.19 이후 격변기의 정국을 틈타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하여 18년간 군사독재자로 군림하다가 암살당한 정치군인이다. 박정희는 군사 쿠데타로 정치권력을 찬탈한 후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 표현을 혼란과 분열로 매도하여 5.16 군사 쿠데타를 합리화하기 시작했다. 지나온 역사적 사실들에서 군중들의 여론 형성 과정을 분열과 혼란으로 매도하여 국민을 집단화시키고 조직화시키는 방법으로 독재의 기반을 다지기 시작했다. 이승만의 부정선거로 촉발된 4.19 민주화운동으로 쟁취한 장면 내각의 민주 정부는 박정희의 군사 쿠데타로 무너지고 18년간의 긴 군사독재가 시작되었다. 박정희의 군사 쿠데타와 군사독재가 남긴 상처는 너무나 깊어서 회복 불가능한 상황에 빠진듯하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가운데 검은 안경) 박정희의 일생사 1917년 11월 14일 - 박성빈과 백남의의 5남 2녀 중 5남으로 출생 1926년~1932년 - 구미 공립 보통학교 입학과 졸업 1932년 ~ 1937년 - 대구사범학교 입학과 졸업 1937년 - 문경 보통학교 교사 부임 1940년 ~ 1942년 - 만주국 육군 군관학교 입학과 졸업 1942년 ~ 1944년 - 일본 육군사관학교 편입학과 졸업 1944년 - 만주 국군 보병 소위로 임관 1945년 - 한국광복군 중대장 1946년 - 9월 조선 경비 사관학교(현 육군 사관학교의 전신) 2기생으로 입학. 12월 졸업, 소위 임관 1946년 - 10월 좌익이 일으킨 대구폭동에 가담한 셋째 형 박상희는 ...

일본의 무사 사무라이 (侍, さむらい, Samur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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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라이라고 하면 일본도를 허리에 차고 삿갓을 쓰고 게타를 신고 건들거리면서 다니는 사람을 생각한다. 삿갓 쓰고 게타를 신고 긴 칼 옆에 차고 다니는 사무라이는 '아시가루'라고 하는 계급으로 따지면 최하급 사무라이라고 한다. 사무라이와 사무라이 정신에 대해서 제대로 알아야 일본인과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사무라이의 문화와 생활 방식을 배우고 경험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일본 전역에서 사무라이와 관련된 성(castles), 사무라이가 거주하던 주택, 사무라이 박물관, 사무라이 테마 놀이공원, 사무라이  옷차림으로 사무라이 문화와 생활 방식에 대해 배우고 경험할 수 있는 여러 방법이 있다. Pixabay / OpenClipart-Vectors 1. 사무라이 사무라이 (또는 부시)는 전근대(premodern) 일본의 전사(戰士, warrior)였다. 에도시대(江戸時代, 1603-1867)에는 사무라이들이 일본의 실질적인 지배계층이었다. 사무라이는 활과 화살, 창, 총과 같은 다양한 무기를 사용했지만 주요 무기와 상징은 칼이었다. 사무라이는 무사도의 윤리 규범에 따라 생활해야 했다.  유교적인 무사도는 주인에 대한 충성, 자기 규율, 존경심 있고 윤리적인 행동과 같은 개념을 강조했다.  많은 사무라이들은 선불교의 가르침과 관습에 따랐다. ...

중국 공산주의자 마오쩌둥 (毛澤東, Mao Zedong) - 희대의 살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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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대의 살인마 마오쩌둥 이름 마오쩌둥 (毛澤東, Mao Zedong) 출생 1893년 12월 26일  사망 1976년 9월 9일 태어난 곳 중국 후난성 샹탄  직업 군인, 공산주의 독재자  출생 배경 1893년 12월 26일 청나라 후난성 샹탄의 부유한 농가에서 농부 마오이창(毛貽昌)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의 형제 두 명이 요절로 사실상의 맏이가 되었다. 경력  중화인민공화국 초대 중앙위원회 주석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장 겸 최고 중앙인민 총 주석 중국 공산당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장 중국 공산당 대표 최고 중앙지도위원장 초대 중국 공산당 국가원수 초대 중국 공산당 제1대 중앙위원회 위원장 저지른 만행 1. 대약진 운동으로 동족인 중국인을 4천5백만 명 학살 2. 문화 대혁명으로 동족인 중국인을 2천만 명~3천만 명을 학살 3. 토지 개혁으로 수백만 명 학살 4. 정치 운동으로 수백만 명 학살 5. 북괴의 6.25 남침 때 북괴와 함께 한국을 침략한 전쟁범죄자이기도 하다 6. 중국의 문화, 사회, 경제, 외교 관계에 입힌 물적, 인적, 문화적 피해는 수치로 계산이 힘들 정도다.  기타 시진핑의 아버지가 마오쩌둥의 최측근 중에 한 명인 시중쉰(習仲勛)이다. 시중쉰은 마오쩌둥에 의해 반당 집단으로 몰려 16년간 구속되어 있다가 그 후 복권되었다. # 공산주의자들은 왜 동족을 저렇게 마구잡이로 죽일까? 히틀러는 동족은 죽이지 않았는데 마오쩌둥은 동족을 마구잡이로 학살했다. 저런 학살을 일삼는 공산주의자들이 오늘날 좌파 혹은 진보의 탈을 쓰고 일본이 어쩌고저쩌고 히틀러가 어쩌고저...

야스쿠니 신사 (靖國神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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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쿠니 신사에 대한 자료를 찾다 보니 이해가 안 되는 게 있다. 일본은 "야스쿠니 진자"라고 하는데 한국에서는 왜 "야스쿠니 신사"라고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 한국말로 읽을 거면 "정국 신사(靖國神社)"라고 하던가 앞에는 일본어로 읽고 뒤에는 한국어로 읽는 이유가 뭘까? 한국에 "신사"라는 종교 시설이 있으면 그럴 수도 있지만 한국에는 "신사"라는 종교 시설이 없다. 각설하고  이 글은 야스쿠니 신사에서 발행한 야스쿠니 신사 팸플릿(靖國神社パンフレット)의 글을 옮겼다. 하이덴 - 메인 홀 야스쿠니 신사의 역사 메이지 2년 (1869년) 6월 29일 메이지 천황의 뜻을 받들어 도쿄 구단에 세운 쇼콘사(招魂社)가 메이지 12년(1879년)에 야스쿠니 신사(靖國神社)로 개칭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메이지 7년(1874년) 1월 27일 메이지 천황이 처음으로 쇼콘사를 참배하며 읊은 시 "나라를 위해 목숨 바쳐 싸운 그대들이여, 그대들의 이름이 무사시노의 이 신사에 영원히 살리라."에서 알 수 있듯이, 야스쿠니 신사는 국가를 위해 고귀한 목숨을 바친 이들을 기리고 그 업적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해 세운 신사입니다. 메이지 천황이 지은 이름 '야스쿠니(靖國)'에도 조국의 평화를 지키고자 하는 염원이 깃들어 있습니다. 야스쿠니 신사에서는 1853년 이후 보신전쟁(戊辰戦争), 러일전쟁,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등에서 오로지 나라를 를 지키려는 일념만으로 귀중한 목숨을 희생한 246만 6천여 명의 영혼을 신분, 공훈, 성별에 관계없이 모두 똑같이 신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신령(神靈)을 달래기 위해 다양한 의식...

군사 반란 주동자 이성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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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계는 고려의 군인으로서 걸핏하면 고려를 침략하여 약탈, 부녀자 강간, 살상을 일삼고 고려 사람을 명나라로 끌고 가는 명나라의 침략을 막기 위하여 고려 우왕의 명령으로 명나라의 요동을 정벌하기 위하여 군대를 이끌고 출병하다가 압록강 하류에 있는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려 어이없게도 고려를 공격하여 무너뜨리고 정권을 탈취한 군사 반란 주동자이다. 건원릉 / 출처 : 위키미디어 본관 전라도 전주 이가   출생 1335년 10월 27일(음력 10월 11일)   사망 1408년 6월 18일(음력 5월 24일)   조선 왕으로 재위 기간 1392년 8월 13일부터 1398년 10월 22일까지 6년 2개월 정도 조선의 왕의 자리에 있었다.   무덤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에 있는 건원릉 #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은 이성계 집안의 공동묘지다. 군사 반란으로 고려를 붕괴시키고 끔찍한 학살을 자행한 주동자 이성계와 일족의 무덤을 저렇게 버젓이 놔둬도 되는 건가? 고려 왕 씨 집단 학살  이성계는 군사 반란에 성공하자 왕 씨 멸족령을 내리고 고려의 왕족이었던 왕 씨들을 예성강에 수장시켜 학살하고 고려의 애국자들을 개성의 두문동에서 불태워서 학살하였다. 이성계가 학살한 사람이 2천 명을 넘었다고 하며 전국적으로 이성계에게 동조하는 반란군에 의해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하였다. 겨우 살아남은 왕 씨들은 '임금 왕(王)'자에서 모양을 변형하여 전 씨(田, 全), 옥 씨(玉), 차 씨(車), 신 씨(申) 등으로 바꾸어 살았으며 이방원이 왕의 자리에 올라서 왕 씨 멸족령을 해제하였다 이성계가 집단 학살한 왕 씨는 개성 왕 씨다.  1차 왕자의 반란 1398년 8월 26일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인 이방원이 권력을 탈취하기 위하여 측근들과 다른 형제들과 공모하여 세자인 형 이방석과 이성계의 신하인 정도전 등을 죽이고 아버지인 이성계로부터 권력을 빼앗아 이성계의 둘째 아들을 허수아비 왕으로 앉히고 이방원이 권력을 장악하였다.   2...

이승만을 대통령이라고 불러야 하는지 의문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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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은 1875년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대 경리 능내동(陵內洞)에서 이경선(李敬善, 1839~1912)과 김해 김씨(金海金氏, 1833~1896) 사이에 3남 2녀 중 막내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전라북도 전주이고, 첫 이름은 승룡(承龍), 호는 우남(雩南), 양녕대군의 방계 16대손이다. 이승만 1890년 이승만은 동갑내기인 박춘겸(朴春兼)의 딸 음죽 박 씨(박승선)와 결혼하여 1898년 외아들 이봉수를 낳았다. 외아들 이봉수가 1906년 디프테리아로 죽자, 이승만의 부친 이경선은 이승만에게 이혼하라고 했고, 이승만은 이혼했다. 박씨 부인은 6·25 전쟁 때 인민군에게 피살되었다고 한다.   1899년 고종이 독립협회 지도자들을 체포 구금하고 만민공동회를 무력 진압하는 과정에서 박영효의 황제 퇴위 음모에 연루됐다는 혐의로 5년 7개월간 한성 감옥에 갇혔다. 독립협회는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목표로 서재필 등의 개화파 주도로 만들어지고 서대문에 있던 중국 사신들을 맞이하던 영은문(迎恩門)을 뜯어내고 그 자리에 독립문(獨立門)을 세우기도 했다. 1904년 - 1910년 미국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서 학사, 하버드 대학교에서 석사,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의 소리 초단파 방송을 통해 한반도 동포들의 투쟁을 격려했다. 1908년 1908년 3월 23일 전명운, 장인환 의사가 대한제국의 외교 고문 친일파 미국인 더럼 스티븐슨을 암살하여 미국 법정에 서게 되면서 미주 한인들이 법정 통역을 이승만에게 요청하였으나 이승만은 살인범의 재판에 통역을 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1919년 3월 3일 국제 연맹 위임통치 청원서를 파리 강화회담에 제출하려고 시도하였으니 실패하였다. 3.1 독립선언 이틀 후에 국제 연맹 위임통치 청원을 제출하려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많은 비난을 받게 된다. 1919년 3월 21일  연해주의 대한 국민의회(노령 임시 정부)에서 국무경(국무총리 겸 외무총장)에 선출되었다.   ...

각국의 공산화(사회주의 독재화) 희생자 수 - 공산주의 흑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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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란 국민을 위한 정치라고 생각한다. 국민이, 사람이 살아가는 과정을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자유롭게 만들어주는 게 정치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이던 사회주의 독재 국가이던, 군사독재 국가이던 모든 나라의 정치는 그 나라의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행해져야 하는 게 정치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권력을 손에 쥐면 수많은 사람을 살해하고 굶겨 죽인다. 특히 공산화 과정에서는 너무나 잔인하게 사람을 학살한다. 출처:Britanica   히틀러는 2차대전으로 수많은 사람을 죽게 만들었지만 자신의 동족은 무차별 학살하지는 않았다. 공산주의자들은 자기 동족을 무차별 학살했다는 점에서 공산주의자들의 끔찍한 잔인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북한의 김정은은 고모부를 불태워 죽였다고 한다. 공산주의자들이 왜 이렇게 자기와 같은 동족을 무차별 학살할 수 있는지 그 정신세계가 궁금해진다. 혹시 공산주의자들이 같은 민족인 동족을 이렇게 무차별 학살할 수 있는 것은 유물론 신봉자들이라서 그런가? 유물론에 대해서 공부 좀 해봐야 되겠다. 공산주의 흑서(The Black Book of Communism)의 통계에 따르면 약 9,400만 명에서 1억 명에 달하는 사람이 희생되었다고 추산된다.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동족 학살등의 희생자 수 동족을 1억 명 가까이 학살한 중국 공산당이 꼴랑 5만 명 정도 죽었다는 난징 대학살 운운하는 거 보면 공산주의자들의 파렴치함은 어이가 없을 따름이다. 살 인마들의 집단이 중국공산당이라는 생각이다.

김재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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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정보부 부장(현재는 국가정보원 원장)으로 재직하던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방에서 양쪽에 젊은 여대생과 젊은 여가수 끼고 앉아서 술을 마시던  박정희를 권총으로 사살하고 교수형에 처해진 인물이다. 1979년 10월 16일에 시작된 부산 민주화 운동으로 부산 시내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계엄군이 탱크를 몰고 나와 부산 시내를 통제하고 있던 때였다. 김재규는 최후진술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박정희를 사살했다고 말했다. 김재규 군사독재자 박정희와 한통속이 되어 대통령 다음으로 최고 권력의 자리에 앉아서 대통령을 지키던 사람이 부산에서 민주화 운동이 발생하고 계엄령이 선포되니까 박정희를 사살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혁명이라고 주장했는데 내가 보기에는 자신이 살기 위한 몸부림일 뿐이라는 생각이다. 각설하고 대한민국에서는 자유민주주의를 실시해 본 적이 없었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장기집권 획책으로 군인과 경찰을 국회의사당에 투입해 공포 분위기를 만들어 두 번이나 헌법을 뜯어고치고 그것도 부족하여 부정선거까지 자행하다 항의하는 국민을 186명이나 무차별 학살한 게 자유민주주의 인가? 박정희가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하여 18년간 군사독재한 것이 자유민주주의인가? 김재규는 박정희의 군사독재에 부역한 똑같은 독재자일 뿐이라는 생각이다. 지금 김재규의 재심이 열리고 있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민주인사가 될지언정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고 본다.   근현대에 군사 쿠데타가 발생하고 군사독재를 경험한 나라는 대부분 공산주의 국가가 되던데 한국은 어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