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3월 14일 토요일

이승만을 대통령이라고 불러야 하는지 의문점이 든다.

 이승만은 1875년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대 경리 능내동(陵內洞)에서 이경선(李敬善, 1839~1912)과 김해 김씨(金海金氏, 1833~1896) 사이에 3남 2녀 중 막내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전라북도 전주이고, 첫 이름은 승룡(承龍), 호는 우남(雩南), 양녕대군의 방계 16대손이다.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출발을 더럽힌 범죄자에 불과하다.
이승만

1890년
이승만은 동갑내기인 박춘겸(朴春兼)의 딸 음죽 박 씨(박승선)와 결혼하여 1898년 외아들 이봉수를 낳았다.
외아들 이봉수가 1906년 디프테리아로 죽자, 이승만의 부친 이경선은 이승만에게 이혼하라고 했고, 이승만은 이혼했다.
박씨 부인은 6·25 전쟁 때 인민군에게 피살되었다고 한다.
 
1899년
고종이 독립협회 지도자들을 체포 구금하고 만민공동회를 무력 진압하는 과정에서 박영효의 황제 퇴위 음모에 연루됐다는 혐의로 5년 7개월간 한성 감옥에 갇혔다.
독립협회는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목표로 서재필 등의 개화파 주도로 만들어지고 서대문에 있던 중국 사신들을 맞이하던 영은문(迎恩門)을 뜯어내고 그 자리에 독립문(獨立門)을 세우기도 했다.

1904년 - 1910년
미국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서 학사, 하버드 대학교에서 석사,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의 소리 초단파 방송을 통해 한반도 동포들의 투쟁을 격려했다.

1908년
1908년 3월 23일 전명운, 장인환 의사가 대한제국의 외교 고문 친일파 미국인 더럼 스티븐슨을 암살하여 미국 법정에 서게 되면서 미주 한인들이 법정 통역을 이승만에게 요청하였으나 이승만은 살인범의 재판에 통역을 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1919년 3월 3일
국제 연맹 위임통치 청원서를 파리 강화회담에 제출하려고 시도하였으니 실패하였다.
3.1 독립선언 이틀 후에 국제 연맹 위임통치 청원을 제출하려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많은 비난을 받게 된다.

1919년 3월 21일 
연해주의 대한 국민의회(노령 임시 정부)에서 국무경(국무총리 겸 외무총장)에 선출되었다.
 
1919년 4월 11일 
상해 임시 정부의 국무총리에 추대되었다.

1919년 4월 14일 
한인 회의에서 이승만은 한국이 독립하면 기독교 국가 건설과 미국식 민주제를 시행하겠다고 말했다. 
4월 16일 이승만은 미국 독립기념관으로 행진하여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앉았던 의자에 앉아서 찍은 사진이 남아 있다.

1919년 9월 6일 
상해 임시정부는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
 
1925년 3월 23일 
상해 임시정부의 임시 의정원은 이승만에 대한 탄핵을 의결해 대통령직에서 면직시키고 곧바로 박은식을 임시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탄핵사유 : 

국제연맹 위임통치 청원: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 "한국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하에 두어 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한 것이 밝혀져, 독립운동가들로부터 '나라를 팔아먹는 행위'라는 강력한 비판을 받았다.

직무 유기 및 무능: 임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음에도 주 활동지인 상하이 임시정부를 떠나 미주에 머물며 6년간 약 6개월만 상하이에 체류하는 등 대통령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다.

헌법 위반 및 독단적 운영: 임시의정원의 결정을 무시하고, 국무원(내각)과 불화하며 마음대로 법령을 발표하여 법을 경시했다.

재정 불투명 및 민심 분산: 미주 지역에서 거둔 독립 운동 자금(인구세)을 임시정부에 보고하거나 입금하지 않고 자의적으로 사용했다는 의혹이 있었다.

정부 고립 및 분열 조장: 다른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불화하고, 임시정부의 권위를 부정하는 등 내부 분열을 일으켰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 상해 훙커우 공원 폭탄 투척 의거를 비판했다.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는 윤봉길의 의거를 좋게 평가했다.

1945년 
광복 후 김구와 함께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주도했다.

1948년
제헌 국회에서 제헌 국회의장으로 선출되었으며, 그해 국회에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제헌헌법은 대통령을 국회에서 선출하게 되어 있었다.

1952년 
전쟁 통에 이승만을 지지하는 국회의원들이 대거 탈락하자 6.25 피난처인 부산에서 경찰과 헌병(현재는 군사경찰이라고 함)을 동원하여 국회를 포위하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이승만의 대통령 재선을 위해 불법으로 개헌한 친위 쿠데타였다.
이때의 개헌을 발췌개헌(拔萃改憲)이라고 하는데 이승만이 주장하는 대통령 중심제와 국회의원들이 주장하는 의원내각제를 발췌하여 만든 짬뽕 개헌이라서 발췌개헌이라고 한다.

1954년 
이승만의 영구 집권을 위하여 조직폭력배 이정재와 부하들을 국회에 투입해 놓고 사사오입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의결정족수에도 미치지 못하는 불법 개헌이었던 것이다.

1960년 
1960년 3월 15일 제4대 대통령 선거에서 부정선거를 저질러 4.19가 일어났고, 시위군중을 향하여 무차별 발포하여 시위군중 186명을 살해하고 6,000여 명에게 부상을 입혔으며 시위가 더욱더 격렬해지자, 대통령직을 사퇴하고 하와이로 도망갔다.
하와이에서 살다가 하와이에서 죽었지만, 한국에서 가족장으로 초상 치르고 서울 현충원에 매장되었다.

이승만에 관한 내용을 쭈욱 적어 보았다.
이승만이라는 사람은 대한민국을 위하여 무슨 일을 한 것일까?
이런 이승만을 존경한다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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